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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리뷰] 양귀자 '모순' ㅣ 삶은 모순으로 이어진다

by mileyy 2024.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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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부피는 너무 얇다. 겨자씨 한 알 심을 만한 깊이도 없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책 표지에 적힌 글귀 하나로 마음을 뺏겼다. 1998년에 출간된 소설이고, 어느 유튜버의 인생책으로 꼽혀 26년 만에 다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고. 

소설의 배경은 1990년대, 소설 속 이제 20대 중반이 된 주인공 안진진은 삶에 위 같은 의문을 지니더니 돌연 결혼을 결심한다. 아직 사랑이라는 것도 몰랐던 그녀에겐 호감을 보이는 두 명의 남자가 있었고, 그 둘의 성향은 정반대였지만 각자의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첫 번째 남편감 후보는 컴퓨터 학원에서 만난 나영규. 전반적으로 안정적인 환경을 지닌 그는 대단히 계획형의 남자라 모든 데이트 코스를 사전에 계획하고, 심지어 어렸을 적부터 그려온 자신의 삶의 계획에 따라 29세에 결혼하기 위해 안진진에게 프로포즈한다. 안진진은 나영규에게 남성적인 매력을 못 느끼고 크게 설레지도 않지만 쉽게 말하기 힘든 집안사정들은 왠지 술술 터놓는 의지가 되는 사람으로 남편감으로는 꽤 적당한 사람이다.

전국을 누비며 야생꽃을 촬영하는 포토그래퍼 김장우는 두번째 남편감 후보다. 직업 특성상 혹은 자유분방한 성격상 계획적인 삶과 거리가 멀고, 사업이 망해가는 형을 도와야하는터라 안정적인 편도 아니다. 항상 어딘가로 떠나 있지만, 안진진을 위해 아름다운 꽃 사진을 선물한다. 딱딱한 나영규에 비해 낭만을 아는 사람, 그런 매력에 안진진은 김장우에게 더 빠지게 되지만 마음만 끌리고 있을 뿐 편하게 속마음을 툭 터놓을 수 있는 의지가 되는 사람은 아니고 본인이 더 챙겨줘야 하는 남자다.

안진진이 남편감을 고르는데는 어머니와 이모의 영향이 큰데, 극의 재밌는 설정 중 안진진의 어머니는 일란성 쌍둥이다. 결혼하기 전까지 똑같은 삶을 살았던 어머니와 이모는 만우절에 한 결혼을 기점으로 마치 거짓말처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다. 그저 차례대로 선을 본 것뿐인데 안진진의 어머니는 알코올 중독자가 돼버린 남편 때문에 폭력에 시달리고, 생계를 이루기 위해 시장에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 몸과 마음이 거칠어져 갔다. 반면 그녀의 이모는 일과 가정밖에 모르는 로봇 같은 이모부를 만나 고생은 모르는 우아한 사모님으로서 겉에서 보기에 부족함이라곤 전혀 없는 생활을 한다.

나영규와 김장우는 이모부와 아버지의 모습을 연상케한다. 마치 하나의 흐름처럼 안진진과 나영규, 김장우가 어머니와 이모, 아버지와 이모부로 연결돼 있는 듯하다. 나영규는 자신에게 이모의 삶을 살게 해 줄 수 있는 남자고, 김장우라면 어머니처럼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남자다. 안진진의 마음은 김장우에게 더 기울지만 그러면서도 나영규의 마음을 놓지 않으려 한다. 안진진은 나영규의 철두철미한 모습에 숨막혀하면서도 의지하게 되고 챙김을 받는 편안함을 즐기고, 김장우를 만날 땐 본인이 그 역할을 자처하면서 상대방을 챙겨주는 것도 즐긴다.

안진진은 김장우와 떠난 여행에서 김장우에 대한 감정이 사랑임을 깨닫고 이내 그 사랑의 무게를 느끼고 부담스러워하기도 한다. 이전에 느껴본 적 없던 사랑이라는 감정을 갑자기 실감하고는 좀처럼 취하지 않던 술에 잔뜩 취해 김장우에게 괜한 꼬장을 부린다. 안진진이 사랑에 대해 이런 모습을 보이는 데에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안진진이 생각하는 바에 따르면)사랑과 책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나돌다가 아내에게 뺏은 돈이 다 떨어지면 집에 돌아와 돈을 훔쳐나가는 생활을 했다. 그러나 안진진은 그런 아버지를 크게 증오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위에서 아버지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도 그녀는 아버지와 좋았던 일화를 기억하며 이해하려고 애쓴다. 

그런 면에서 김장우를 선택하려 했던 안진진의 결심은 이해가 간다. 아마 이모가 자살하는 충격적인 사건만 없었다면 예정대로 나영규의 청혼을 거절하고, 김장우의 낭만을 쫓아가지 않았을까. 그러나 마치 완벽해 보였던 이모의 삶은 실제론 자신을 잃어버리고 감옥에 갇힌 듯한 절망감으로 가득 차있었고, 마음을 쏟았던 자식들이 미국 유학이 끝나도 현지에서 정착하길 결정하자 결국 삶의 희망을 놓아버렸다. 

상황에 대처하는 모습마저 안진진의 어머니와 이모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한다. 남편이 알콜중독자가 되어 본인이 궂은일이라도 해서 자식을 먹여 살려야 했을 때도, 아들이 살인 미수로 교도소에 들어가게 됐을 때도,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던 남편이 치매에 걸려 돌아왔을 때도 안진진의 어머니는 야생화처럼 더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모는 온실 속에서 시들어가다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안진진은 나영규와 결혼하면서, 이 모순된 선택이 스스로를 발전하게 하고 삶을 이어지게 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모의 삶을 선택하면서 결코 이모처럼 지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말이다. 안진진의 선택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기도 하다. 그녀는 처음엔 아버지를, 그리고 어머니와 이모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니까. 그럼에도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강한 사람이니 유산처럼 남은 삶을 마냥 관습처럼 살아내진 않을 것 같다.

26년이 지난 안진진은 어떻게 살고 있을지 상상해본다. 많은 경험들이 안진진을 더욱 다부지게 해서 이모와 어머니의 모습을 반반 닮은 사람이 되어 있을까. 나영규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을까. 50대가 된 안진진의 모습이 쉬이 그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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