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웨일> 대런 애로노프스키 감독 / 브렌든 프레이저 주연 / A24 제작
구원에 관한 이야기.
nobody can save you, but yourself라는 말이 있는데 부다인지, 어느 철학자인지 정확히 누가한말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 but yourself를 even yourself로 바꾸게 된다. 스스로 자신마저 포기하면 정말 아무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애초에 구원이라는 단어가 애석하게 느껴진다.
영화는 시작부터 주인공 찰리에게 일주일의 시한부 선고를 날리고, 그의 일주일을 따라가는 형식을 취한다.
대학 강사인 찰리는 섭식장애로 초고도비만이 되어 혼자서는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다.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온라인 강의에서 카메라가 고장 났다는 핑계를 대고 집 밖에도 나가지 않는다. 자위를 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에 무리가 와서 죽음의 문턱에 닿을 찰나 집에 찾아온 사이비 선교사 토마스에게 발견돼 간신히 고비를 넘긴다. 치료할 돈이 없다며 병원에 가지 않아 유일한 친구인 간호사 리즈가 옆에서 보살펴주지만 증세가 심해진 탓에 리즈도 더 이상 손 쓸 도리가 없다. 찰리는 이를 알고도 삶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가 집착하는 것은 에세이와 딸뿐이다.
찰리는 살 날이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고는 8년 전 버리고 나온 딸 엘리에게 연락한다. 그는 8년 전 제자 앨런과 사랑에 빠지면서 성정체성을 깨달았고, 전처와 이혼하면서 딸에게 접근 명령이 떨어져 연락할 수 없었다. 지독한 문제아로 자란 엘리는 8년전 자신을 버리고 간 아빠에 대한 원망과 증오심이 가득한 채로 찰리를 찾아온다. 엘리는 거친 말을 쏟아내며 못된 행동을 서슴지 않지만, 찰리는 엘리의 모든 행동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찰리는 엘리에게 매일 집에 와서 에세이를 쓰면 전재산을 주겠다는 제안을 하고 낙제 위기에 처했던 엘리는 이를 승낙한다.
찰리는 엘리가 8년 전 쓴 에세이를 마치 주문처럼 외우면서 엘리가 에세이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멋진 아이라고 치켜세운다. 성의 없이 쓴 글에서도 운율을 찾으며 감동하고, 몰래 수면제를 타 먹여 산소통에 의지하는 신세가 되어서도 엘리의 편을 든다. 처음엔 찰리의 이런 모습이 딸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그저 자기 위안이다. 영화 후반부 그는 절규하듯 "내 인생에서 잘한 일이 하나라도 있다는 걸 알아야겠다"며 소리치는데 결국 자신의 삶도, 사랑했던 파트너의 삶도, 전처의 삶까지 모든걸 망가뜨린 그가 딸 엘리만은 망가뜨리지 않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집착이 된 모습을 보여준다. 엘리가 그의 삶에 남아있는 마지막 한줄기 빛이었을 테다.
가정까지 버릴 만큼 사랑했던 연인이 자신을 선택한 일 때문에 가족에게 외면당한 채 우울증에 빠져 세상을 등졌을 때 찰리가 느꼈던 슬픔과 무력함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안간다. 사랑이 죄처럼 느껴지거나 사랑에 대해 의문이 생기지 않았을까.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을 떠나보내고 그 슬픔에 빠져 찰리도 자신의 감정과 이성을 주체하지 못해 초고도비만이 돼버렸다. 살아있다는 괴로움, 살아내야 하는 현실의 끔찍함, 둘 곳 없는 마음들이 찰리를 계속 허기지게 했다. 죽음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인지했음에도 폭식을 멈출 수 없었던 건,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허기짐이 - 죄책감, 후회, 무력함, 자신을 집어삼킨 다양한 감정들의 구멍이 - 너무 컸기 때문이었을까.
찰리가 숨이 가쁠때마다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읽고 싶다고 한 엘리의 에세이는 모비딕을 읽고 쓴 감상문인데, 하얀 고래를 죽이기 위해 집착하는 소설 속 주인공의 삶이 찰리의 삶과 겹쳐 보인다. 찰리는 스스로가 모비딕의 선장이자 고래가 되어 자신을 죽이기 위한 여정을 한 것이다. 죽음을 직감한 찰리가 에세이를 읽는 엘리를 향해 마지막 힘을 내 걸어가는 모습에서 마치 찰리가 한 마리 고래가 되어 다가오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자신의 한줄기 빛인 엘리와 다시 교감을 나눈 순간 하얀 빛이 화면을 뒤덮으며 그의 죽음을 암시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6년 전 쯤,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던 적이 있다. 일도 힘들고 사람을 상대하는 것도 힘든데 그만둘 수가 없었다. 거의 매일 저녁 미팅을 빙자한 술자리에 나갔고, 술약속이 없는 날은 밀린 일을 했다.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혹사시키다 제 풀에 꺾여 쓰러지면 끝나지 않을까, 그럼 그때 모든 걸 그만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스스로를 몰아붙여도 달라지는 건 없었고 오히려 악화될 뿐이었다. 건강은 서서히 나빠져갔고 스스로를 돌보지 못해 마음까지 망가져버렸다. 열심히 자신으로부터 도망쳐봤자 결국 마주하는 건 더욱 황폐해진 나였다. 이후부터 가능한 스스로를 돌보고 아껴주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최소한 이전처럼 스스로를 벼랑으로 몰고 가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는다.
영화가 말해주듯 애초에 구원은 없다. 스스로를 포기하고 싶게 하는 비극적인 일들도 일어난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건 자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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