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항준 감독의 유튜브 콘텐츠 '넌 감독이었어'를 즐겨보는 편이다. 장항준 감독과 친분이 있는 영화계 사람들이 출연하는데, 최근 '남매의 여름밤'을 찍은 윤단비 감독님이 출연했다. 장항준 감독이 윤단비 감독의 데뷔작 '남매의 여름밤'을 그 해에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라고 꼽아서 궁금한 마음에 검색해 보니 해외와 국내 영화제에서 상당히 많은 상을 수상한 작품이었고,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었다.
독립 영화 특유의 날 것, 풋풋함, 어색하거나 어설프지만 너무나도 인간적인 매력이 뚝뚝 묻어나는 작품이었다. 아, 독립영화는 이런 매력이 있었지 하며 오랜만에 정말 괜찮은 독립영화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옥주네 가족이 재개발 동네를 떠나 할아버지 댁으로 이사오면서 시작된다. 할아버지 댁은 서울 외곽에 있는 정말 오래된 2층짜리 양옥집이다. 내부 벽도 바닥도 천장도 나무로 마감돼 살짝 어둡지만 그래도 정감 가는 집, 할아버지의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가전과 가구들, 소품들 하나하나가 다 예전의 것이라 이제 중학생 혹은 고등학생인 옥주와 초등학생인 동생 동주에게는 마치 과거여행을 온듯한 느낌이었을 테다. 집을 구하기 전, 방학 때만 지낼 거라는 아빠의 말에 할아버지는 그저 묵묵히 손주들을 받아들여주신다. 사춘기 소녀 옥주는 2층을 선점해 버리고 동주에게는 접근도 하지 못하게 한다. 알뜰히 챙겨 온 모기장을 치고는 동주에게 나가라고 신경질적으로 얘기하지만, 막상 고모가 집에 놀러 왔을 때는 선뜻 좁은 모기장 안에서 같이 자자고 한다.
옥주는 쌍커풀 수술을 하고 싶어서 아빠한테 돈을 빌려달고 하지만 충분히 예쁘다며 바로 저지당한다. 아빠의 봉고차에서 신발을 훔쳐서 팔려고 나갔지만, 짝퉁일지 의심이 많은 구매자가 부모와 통화하게 해달라고 하니 겁을 먹고 도망친다. 그러나 바로 잡혀서 경찰서에 가게 되고, 보호자인 아빠가 찾아와 대신 사과하면서 일단락된다. 이래저래 속상하고 쪽팔린 옥주는 아빠에게 죄송하다는 말 대신 되려 신발이 짝퉁이었냐고 따져 묻는다.
이 상황은 후에 한번 더 회자되는데, 아빠와 고모는 할아버지가 치매에 걸리자 요양 병원으로 모시고 집을 내놓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옥주가 아빠에게 할아버지한테 말도 없이 그러면 안 된다고 꼬집어서 말하자, 아빠는 너도 신발 가져가다 네 맘대로 팔지 않았냐며 똑같은 얘기라고 맞수를 둔다. 어이없는 맞대응을 하는 아빠의 모습에 화가 난 옥주는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서는 짝퉁이라는 게 들킬까 봐였는지 괜한 분풀이인지 줬던 신발을 빼앗아버린다.
이혼하고 따로 사는 엄마를 만나러 간다는 동생의 말에 엄마 만나지 말라며, 약속을 어겼던 지난 일을 언급하면서 괜한 기대를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엄마를 만나고 선물까지 받아온 동생의 모습에 또 화가 나 때리고 선물을 빼앗으며 결국 울리고 만다. 할아버지가 말려서 멈추게된 이 싸움은 할아버지가 응급실에 실려가셔서 둘만 남게 되자 옥주가 먼저 사과하고, 이에 동생은 천연덕스럽게 우리가 언제 싸운 적 있었냐고 답하며 일단락된다.
잘 때 꼭 애착인형 겸 배게를 챙기는 기껏 해봤자 초등학교 3~4학년쯤 됐을 동주는 천방지축 같아 보여도 꽤나 의젓하다. 누나 옥주와 티격태격하면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를 챙긴다. 힘들 법도 한데 힘들다는 내색도 한번 안하고, 할아버지 앞에서 춤추면 핸드폰 사준다는 말에 개구진 춤을 춰 가족들에게 웃음꽃을 선사한다. 동생은 딱 두 번 춤추는데, 한 번은 할아버지의 생일 파티 때였고, 다른 한번은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을 찾은 엄마까지 가족 다 같이 밥을 먹을 때다. 어려서인지 아님 직감적으로 분위기 메이커를 할 수 있는 똑똑한 친구다.
얼핏 생각되기엔 옥주와 동주 남매의 여름밤이겠지만, 또 다른 남매인 아빠와 고모의 여름밤이기도 하다. 어느 여름에 남매 둘 다 각자의 이유로 떠났던 부모님 집으로 돌아왔고, 어느 여름밤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고모는 아버지의 건강이 걱정돼 왔다는 핑계로 조카들과 함께 할아버지의 집에 머무른다. 별거 중으로 딱히 갈 곳이 없었던 고모는 이를 터놓지 못하고 밤마다 담배와 술을 친구 삼아 보낸다. 한밤중 몰래 나가 맥주를 마시고 들어와서는 옥주에게 문 열어 달라고 전화하거나 어린 옥주에게 맥주를 권하는 다소 철없어 보이는 캐릭터지만, 할아버지와 조카들을 살뜰히 챙긴다.
아빠와 고모는 집 앞 슈퍼 평상에 앉아 맥주 한잔하면서 과거 얘기도 하며, 현실적인 얘기도 나눈다. 할아버지(그들의 아버지)가 치매 걸린 사실을 안 후, 집 처리 문제에 대해 아웅다웅하기도 한다. 장남이고 오빠란 이유로 부모님한테 더 많은 지원을 받았고, 그에 대해 문제 삼지 않았다면서 집만큼은 반반 나눠야 한다는 고모의 말에 여동생이라는 비슷한 처지로서 깊은 공감이 되기도 했다.
아빠는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상대적으로는 존재감이 약하지만, 몇 차례 사업에 실패하고 귀여운 다마스 차에 짝퉁 신발을 가지고 다니며 팔면서도 큰 소리로 판매를 적극적으로 하지 못하는 다소 소심한 성격이다. 그러니 딸에게 너도 똑같지 않냐며 어이없는 맞대응을 하질 않나, 동생의 남편이 장인어른도 계시는 처가댁에 찾아와 소리를 지르는데도 큰소리 못 치고 달래어 보낸다. 그러나 두 아이의 아빠이자, 자신도 아버지의 자식으로서 가족을 끈끈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이다.
사업에 실패하고, 결혼에 실패해서 다시 할아버지 집으로 모였지만 그렇기에 절대 잊을 수 없는 여름밤을 보낼 수 있었다. 유독 할아버지를 잘 챙겼던 옥주에게도, 할아버지를 잘 따랐던 동주에게도 그리고 아빠와 고모에게도 할아버지를 곁에서 떠나보낼 수도 있었던 시간은 특별하게 남을 것 같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아버지가 아들에게 치는 싱거운 장난을 그 아들에게도 똑같이 하는 것처럼, 언젠가 옥주와 동주가 나이가 들어 다시 그 집에서 맥주 한잔 하면서 추억을 회상할것 같다. 여름이 지나 곧 가을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다시 여름이 오는 것 처럼 말이다.
여름밤은 무더운 여름을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을 가진 존재다. 숨이 턱턱 막히는 여름 한낮의 더위를 지나 그래도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여름밤. 여름밤 특유의 공기, 냄새가 느껴지는 괜히 마음을 선선하게 만드는 여름밤의 매력을 닮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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