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가슴과 머리를 동시에 훅 찌르고 들어오는 제목부터 강렬하다.
주인공은 전쟁 중 화재로 어머니를 잃은 11살 소년 마히토이다. 군수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가 어머니의 여동생과 재혼하고 시골로 이사오면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머니의 여동생과 재혼하여 시골의 외가댁으로 돌아오는 설정이 요즘의 시각으로는 이해가 가진 않지만 꽤 과거에는 관습처럼 행해지기도 했다. 아내가 죽었을 경우에 처제를 처로 들이거나, 혹은 남편이 죽었을 경우에 시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는 일들은 역사서에 종종 등장한다. 더욱이 이들의 관계는 후에 극을 이어가는데 중요한 설정이 된다.
엄마를 꼭 닮은 이모가 새엄마가 됐고, 자신의 동생을 임신했다는 사실이 아직 어린 마히토에게는 부담이 됐을터다. 더욱이 마히토 입장에서는 새롭게 이사 온 집이지만 엄마가 살던 집으로 돌아와 많은 사람들이 엄마를 닮았다느니 하는 말을 늘어놓는데 새엄마와 새 가족이 생긴 이 상황이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을 수도 있다.
그런 마히토 앞에 왜가리 한 마리가 접근한다. 불편할 정도로 가까이 날고 방에 들어와 엄마가 살아있다고 말하는 왜가리. 그러나 마히토는 이를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다. 집 한켠에 폐허에 가까운 탑을 봤을 때도 거리낌 없이 들어가려고 한다. 마히토는 자신에게 닥친 일들에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별 의심 없이 직면한다.
마히토는 전학간 학교에 가자마자 다른 아이들의 텃새인지, 아님 일부러 시비를 걸었는지 학교 아이들과 싸움을 벌이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돌을 집어 자신의 머리를 가격한다. 피가 철철 나는 상태로 집에 돌아와서는 오다 넘어졌다고 할 뿐이다. 이 장면에서 마히토의 의도는 명확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학교가 가기 싫었던 건지, 이 상황에 화가 나서 자해를 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 상황을 접한 마히토의 아버지는 노발대발 화를 내며 당장 학교에 찾아가겠다고 날뛰며, 새엄마는 자신의 탓인 거 같아 미안해한다. 그 와중에 마히토는 여전히 담담할 뿐이다.
학교에 가지 않은 마히토는 왜가리를 쫓기 위해 활을 만들면서 시간을 보내던 중, 새엄마 나츠코가 사라지자 찾아나서서 그 뒤를 쫓는다. 함정일게 뻔한 탑으로 들어가는 마히토는 그곳에서 아래 세계로 떨어지게 된다. "나를 아는 자는 죽는다"는 글귀가 쓰여진 고인돌 같은 무덤 앞에서 펠리컨 떼의 습격을 받은 마히토는 키리코의 도움을 받아 상황을 모면한다.
마히토는 키리코를 따라 간 곳에서 새로운 생명의 와라와라와 그들을 탐하는 펠리컨, 불꽃으로 펠리컨을 물리치는 히미의 존재를 인식한다. 히미의 불꽃으로 인해 큰 부상을 당한 펠리컨이 마히토에게 와라와라를 먹으며 살 수밖에 없게 된 당위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죽는다. 마히토는 이 이야기를 듣고 펠리컨에게 예의를 갖춰 땅에 묻어준다. 이는 약육강식의 자연 세계에서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전범 국가인 일본의 감독과 일본어로 이런 대사가 나오니 아무래도 전쟁의 피해자였던 한국 국민의 입장으로 듣기에는 다소 불편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영화의 전체적인 메시지는 아니기에 성급하기 이르다.
마히토는 새엄마 나츠코를 찾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왜가리와 한 팀을 이룬다. 여기서 유명한 역설의 문장이 인용되는데,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 라고 크레타인이 말했다"는 문장이 "모든 왜가리는 거짓말쟁이다. 그렇다면 왜가리는 진실을 얘기하는 것일까, 거짓을 얘기하는 것일까"로 변형되어 나온다. 이는 믿지 못할 왜가리를 믿고 길에 나서는 역설적인 마히토의 상황을 얘기한다. 여정 중에서도 왜가리는 배신을 꾀하는데, 마히토가 쏜 화살에 부리를 맞아 다시 완벽한 새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왜가리가 마히토에게 부리를 채워줄 마개를 만들어달라고 한다. 나무를 깎아 마개를 만들어 부리를 채우자마자 마히토를 배신하려한다. 그러나 마개가 꼭 맞지 않고 불편함을 느낀 왜가리는 다시 마히토에게 고쳐주길 요청하고 마히토는 이를 수선해 주면서 둘은 나츠코를 찾는 여정을 이어간다.
앵무새가 쳐놓은 함정에 걸려 앵무새에게 먹힐 뻔한 마히토를 히미가 구해주면서 마히토는 "살아있는" 엄마를 만나게 된다. 정확히는 엄마 히사코의 어렸을 적 모습이다. 히사코는 어렸을 적, 1년 동안 사라졌다가 돌아온 적이 있는데 히미는 그 1년 동안 아랫 세계에서 지내던 히사코의 모습이다. 히사코는 자신의 동생인 나츠코를 찾으러 왔다는 마히토를 도와주는 과정에서, 마히토가 자신의 아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마히토 역시 히미가 자신의 엄마인 히사코라는 것을 직감한다. 이 세계의 주인은 엄마의 큰 할아버지로, 히미(히사코), 나츠코, 마히토 모두가 큰 할아버지의 혈통이기 때문에 이 세계로 들어올 수 있었다.
나츠코는 아이를 낳으러 이 세계로 스스로 들어온 것 처럼 보이는데, 아마도 이는 마히토가 상처를 만들고 온 날부터 입덧이 심해져 몸이 안 좋아진 나츠코의 선택으로 보인다. 형부였던 사람과의 재혼을 통해 조카를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였으나, 자신 때문에 시골 마을로 오자마자 큰 상처를 입은 마히토의 모습을 보면서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이는 마히토가 나츠코를 찾아 나서며 탑에 들어설 때, 마히토를 따라온 키리코 할머니가 마히토를 만류하며 나츠코를 미워하지 않냐고 했던 말과도 닿아있다. 그러나 마히토가 나츠코를 찾아 이 먼 곳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와서 진심으로 엄마라고 부르는 장면에서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사라지지만 마히토가 산실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금기를 깨트렸기 때문에 히미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아래 세계에서 권력을 잡고 싶어 하는 앵무새 무리의 앵무새 대왕은 히미를 인질로 잡아 큰할아버지를 찾아가고, 마히토는 이를 뒤쫓는다. 히미를 구하러 따라갔던 마히토는 결국 큰할아버지를 마주하는데, 큰할아버지는 아래 세계와 위 세계의 균형을 맞춰왔으며, 자신의 기력이 쇠해가고 세계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마히토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한다. 큰할아버지는 마치 세계를 다스리는 전지자처럼 비쳤지만 돌과의 계약에 의해 그저 균형을 맞추는 자로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마히토는 생명 탄생의 수를 맞추기 위해 펠리컨을 보내 와라와라를 먹게 하면서 균형을 맞추려했던 큰할아버지의 폭력적인 방식에 반기를 든다. 또한, 자신이 스스로 낸 상처를 고백하면서 그 상처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작용했는지를 알게 됐고, 자신 또한 악의를 지닌 사람이라며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제안을 거부한다. 큰할아버지는 균형을 맞출 사람이 없는 혼돈의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지 묻고, 마히토는 이번 여정에서 왜가리와 친구가 되었다며, 앞으로 또 친구를 만들어가겠다고 대답한다. 이 대화를 엿듣던 앵무새 대왕이 이 자리를 기습하며, 균형을 맞추던 돌을 깨트리면서 세계는 파괴된다.
파괴되는 아래 세계에서 다시 자신들이 살던 위 세계로 살아돌아가기 위해 문으로 향하던 마히토는 히미에게 원래 들어왔던 문으로 간다면 후에 불에 타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히미는 마히토 같은 아이를 낳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며 자신의 문으로 향한다. 이후 키리코의 도움으로 나츠코도 무사히 문에 다다르고, 마히토와 나츠코는 다시 현실로 돌아가고 아버지와 상봉한다. 이 과정에서 왜가리는 지나온 세계의 일을 기억하는지 물으며, 균형의 돌을 가지고 온 마히토에게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희미해질 것이라고 말하고는 떠난다.
영화를 보면서 위 언급했던 펠리컨의 대사와 모성을 강조하는 듯한 히미의 모습때문에 불편한 감정이 들긴 했다. 그러나 그것이 영화의 가장 중심적인 메시지는 아니다. 주인공이 괜한 세계의 균형을 맞추지 않고 그저 현실을 마주하겠다는 결정에 이르러서는 이제 시대가 변했음을 보여주면서 선과 악 이분법으로 나눠 괜한 균형을 맞추려 하지 않고, 과거를 답습하지 않고 현재를 살아나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각자의 세계는 오늘도 모든 사람의 마음, 또는 현실에서 무너지고 다시 세워진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미 무너진 세계의 균형을 맞추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럴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영화에서도 현실 그 어디에서도 답은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최소한 그저 단순하게 과거를 답습하거나 나와 다른 대상을 해하는 방식으로는 세계를 이어나갈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영화를 본 후 리뷰 기사나 해석을 담은 영상들을 찾아보며, 이번 영화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내용을 많이 접했는데, 이 영화 전체가 그 스스로도 자신의 은퇴를 번복할 만큼 중요했다고 말하고 싶어 다양한 메시지를 담은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굉장히 심오하고 복잡하다. 지브리 스튜디오 자체가 미야자키 하야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미야자키 하야오는 거대한 지브리 탑을 쌓아왔다.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줄 생각도 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그 과정에서 느낀 바를 담아냈다는 생각도 든다. 이 영화 자체가 미야자키 하야오가 은퇴를 번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고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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